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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좀 더 버릇없이 살고 싶어요 지금보다도 더 예의없이 살고 싶어요 포도를 씻으면서 계속 생각한 거예요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하죠 지금보다 훨씬 예의를 차리곤 하죠 그건 내 콤플렉스예요 컴플렉스라고 분명히 썼는데 콤플렉스라고 바뀌는 한글 파일의 콤플렉스처럼 말이에요 오늘 이 글은 손으로 썼지만 옮기면서는 다른 글이 되어버리고 마는 콤플렉스예요 음악가가 되려고 했어요 한번쯤 그럴 수도 있잖아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처럼 내가 아무것도 아닌 적이 있을까요 당신의 음악을 사랑해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후에도 아무런 연관성 없이 콤플렉스처럼 일어났어요 이런 건 다 콤플렉스예요 노트에는 컴플렉스라고 썼는데 여기서는 콤플렉스라고 쓰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뒤바뀌는 게 계절이에요 이런 계절 또 있을까 단 한 번도 반복되지 않는 게 계절이에요




사실 나는 어딜 향해 이야기하는지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도무지 모르겠어요 포도는 너무 예뻐요 농약이 묻어 있을까봐 흐르는 물에 오래 씻은 컴컴한 보랏빛 포도 포도는 신사임당을 떠올리게 해요 치마폭에 그려진 포도 어릴 적 삽화에서 보았거든요 신사임당을 쓰자마자 갑자기 불안해져요 포도 물은 잘 안 빠지잖아요 포도를 먹다가 옷에 흘리면 안 되는데 물이 안 빠지면 안 되는데 그런 걱정 없이 포도를 먹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내일 일어날 걱정도 없이 술을 먹는다면 좋겠어요 술은 아무 죄 없고 그렇다면 도무지 어디 가서 미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 과거도 미래도 아무런 죄가 없는 걸요




오늘은 가을이 조금 지겨워요 시작한 지 얼마도 안 되어 벌써 지겨워요 멍하게 앉아서 뚫어지게 쳐다봐요 오늘은 몸이 지치고 피로해요 항상 지치고 피로하지만 오늘은 특히 지쳐요 버스에서 잠도 잤는데 도대체 모르겠어요 노트에 써 놓은 건 뭐고 지금 쓰는 건 뭔지 나는 노트에 있는 걸 옮기려고 했는데 여긴 까마득히 알 수 없는 얘기뿐이에요 윗집에선 쿵쾅쿵쾅 아이들이 뛰노는지 어른들이 싸우는지 벽에다 못을 박는지 알 수 없는 소리들 알 수 없는 일들 그리고 나는 도대체 무슨 색깔을 좋아한다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보라색은 어릴 적에 좋아하던 색이고 포도도 보라색인 걸요 엄마 뱃속에선 조금 잠들었을 거예요 그때 아빤 아팠어요 엄마도 아팠어요 나도 아팠지만 숨죽여 살고 있어요 도무지 당신 누구인지 모르지만 숨죽여 이런 글을 쓰듯이요 이 글을 마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너무 길잖아요 너무 긴 건 싫으니까요 시월 저녁에 우리는 모두 조금씩 작아졌다고 믿어요